※ <이능 경찰은 영웅이 아니야> PC3 한시진 과거 이야기.
※ 한시진씨는 어쩌다 DAP에 합류하게 되었나.
※ CoC 시나리오 <이능 경찰은 영웅이 아니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막내야, 어쩌다 형사를 하게 됐냐?"
한 달 하고도 십이일을 잠복근무 한 끝에 사건을 해결하고 다 같이 회식을 했다. 자식새끼들 얼굴도 잊어먹겠다. 누군가 투덜거리면, 저번에 가니까 아저씨라고 부르더라. 누군가 비슷한 소리를 하며 잔을 부딪쳤다. 그래도 오늘 밤은 편하게 잘 수 있겠지. 나지막한 소리에 감성적이라고 타박을 해도 하나같이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우리는 승리자였다. 형사 드라마의 성공한 결말이자 주인공 그리고 이 순간은 쉴 수 있게 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가벼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던가. 사건 해결이 가져다주는 기쁨에 취해 꼬질꼬질한 집단이 영웅처럼 멋있어 보였다고 솔직히 대답했을 때, 그는 크게 웃었다. 미디어의 피해자라며 놀리듯 웃었고, 금세 말을 전해 건배사로 만드는 재주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ㅡ 영웅을 위하여. 걸걸한 사내놈들이 새카맣게 어린 신참 놀리는데 이렇게 진심이다.
"조만간 환상 깨졌다고 울면서 집에 가지나 마라."
"아, 그만 놀리시고, 잔 넘쳐요. 잔!"
"따라주는 대로 마셔. 흘리면 병 째준다."
마구잡이로 건네는 잔을 받아 마시며, 그 뒤로는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 동료들 사이에서 죽도록 술을 먹다 필름이 끊겼겠지. 그래도 새벽,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신 어른들이 신호에 따라 돌아갈 곳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기억은 남아있다. 이제 저 뒷모습에 나도 합류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넌 진짜 형사랑 안 맞는다."
"그렇지 않아도 경위서까지 썼는데, 그만 갈구십쇼... "
"그깟 종이 나부랭이 몇 장 쓰면 반성이 돼?"
"아 진짜... "
등나무 잎이 싯누렇게 죽어가는 늦가을, 떨어지는 잎을 보며 익숙해진 담배를 물었다. 슬프게도 형사에 대한 환상은 선배의 말대로 오래가지 못했고, 버티기에 급급한 나날이 이어졌다. 나무기둥을 힘겹게 붙들고 있는 마른 등나무 가지처럼.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태우고 있자, 답답했는지 선배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궁시렁거렸다.
"또 속았다며?"
"......."
"아직도 걔네가 불쌍한 소리 몇 마디 하면 그걸 믿냐."
허공으로 연기가 더해졌다. 내 것 아닌 매캐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형사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아야 해."
"억울한 사람을 믿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러니까 더 의심을 해야지. 넌 형사가 왜 이혼율이 높은지 알아?"
"ㅡ그거야 가정에 소홀하기 쉽고...."
"순진한 소리 한다. 내가 볼 땐 직업병이야."
가벼운 손동작으로 담뱃재를 털어내는 것을 응시했다. 멀리서 정문을 통과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안으로 차근차근 들어갔다. 점심이라도 먹고 왔는지 한 손에는 캔커피를 하나씩 든 채. 그들 한 명 한 명을 짚으며 선배가 말했다. 저기는 올해, 저기는 작년, 저쪽은 지금 협의 중... 눈치로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듣고서 입 다물고 있자, 남은 담배를 비벼 끄며 그가 말했다.
"형사 직업병이란 게 의심병이거든. 계속 생각해야 해. 저게 맞는 걸까? 저 말이 진실일까? 거짓말은 아닐까? 계속 이런 것만 생각하고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족도 그렇게 보게 된다 이거지. 다들 안 그럴 거라고 하는데, 사소한 대화에서도 진실을 캐내려고 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끝인 거지."
"... 어렵네요."
"그래서 너는 형사가 안 맞는다는 거야. 그렇게 사고를 치고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냐 꽃밭아."
"그래도, 형사가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버석하게 말라가는 등나무가 꼭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앉아있는 벤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은 말라가는 것처럼 보여도, 매 해 5월이 되면 누구보다도 탐스러운 향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때에도 다 같이 모여서 자신과 동료들은 범죄와 싸움을 했고, 등나무 아래에서 맥주를 마셨다. 다가올 긴긴 겨울을 이겨낸다면, 버틴다면 결국 언젠가 괜찮지 않을까. 이것마저도 자신의 치기 어린 희망사항 같아서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꺾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믿어야지."
"방금은 의심하라고 말해놓구선."
자신의 조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배가 답답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린 선배가 말을 이었다. 선배가 아무렇게나 던진 담배꽁초까지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고 있는 내 모습이 기가 찼는지 혀까지 차면서.
"너 대신 의심할 사람을 믿으라 이 소리야. 니가 못하는 거 잘하는 사람 찾아서 뇌 빼놓은 것처럼 그놈 말을 믿어."
"그걸 지금 대안이라고. 그러다 그 사람이 잘못하면 어떡합니까?"
"어쩌긴 같이 감당해야지. 남한테 의심하는 역할 맡겨놓고 너는 빠져나가려고 했어? 아 내가 멍청해서 보는 눈이 없었구나 하면서 같이 수습해야지 지금처럼. 그러니 사람을 잘 고르란 말야. 범죄자 말이나 들어주지 말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좋은 조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절실했고, 꽤 유용하기까지 해서 그 후로 선배와 급격하게 친해졌던 것 같다. 그는 유능한 형사였으며, 동시에 제법 좋은 멘토이기도 했다. 내게는 간신히 찾은 활로 같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자주 팀을 이뤄 사건을 해결했다. 선배가 인체발화사건으로 죽기 전까지.
31건의 사건.
그 단순한 설명 속에 내 지인의 죽음이 담겨있다. 언어는 생각보다 모든 감정을 담아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연쇄성을 입증하지 못해 사고처럼 처리된 수많은 죽음 중 하나였다. 나중에서야 능력자가 개입된 고의적인 범죄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왔고 뒤늦게나마 팀이 꾸려졌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안도했던 것 같다. 당신의 죽음이 복수할 수 있는 죽음이어서. 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어서. 곧이어 이능력 범죄가 뜨거운 화두로 올라왔다. 사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고, 경찰도 대항하기 위해 이능약 적합성 테스트를 시행했다. 묵진현 경감과 만난 것도 그 시기였다.
"이능력 적합률이 쓸만하다던데."
"... 그래서 신설되는 DAP에 발령받을 것 같습니다."
묵진현 경감에 대해 아는 것은 크게 없었다. 강력반 팀장임에도 불구하고 어울리지 않게 목발을 짚고 다녔지만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천재. 사건 해결율도 높지만 뒷소문도 흉흉한 사람. 상사라고는 하지만 말 몇 마디 섞어본 일 없는 머나먼 인물이었다. 천천히 걸어올 때마다 따닥따닥 울리는 목발소리가 어쩐지 거슬렸던 것 같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묵진현 경감의 성격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서류와 컴퓨터 외엔 존재하지 않는 살풍경한 곳이기도 해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을 때,
"흥, 대신 잠입을 해야겠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인체발화사건을 쫓고 있다지? 미련한 놈."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건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ㅡ이번에 신설되는 DAP에 사건의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면?"
"네?"
본인의 사무실임에도 그는 앉을 생각 없이 나를 샅샅이 훑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시선은 어쩐지 고기의 등급을 품평하는 것과 비슷해서 제대로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괜히 나의 바닥까지 전부 보일 것 같아서. 약점을 귀신같이 잡아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 지금 있는 자리도, 그 약점 잡기 덕분이라는 소문도.
"그간 일어난 사건의 추이를 살펴봤다. 놈은 경찰 내부 정보에 빠삭하지. 내부 조력자 도움으로 치기엔 너무 상세해. 분명 놈은 안에 있다."
"그럴 리가..."
나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목발을 바닥에 부딪쳤다. 따악 하는 청명한 소리가 내 정신을 때린다. 그제야 나는 저 사람의 시선이 주는 불쾌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깊고 깊은 불신의 눈. 이 사람은 모두를 의심하고 있다. 심지어 스파이 노릇을 할 나마저도.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마음이 눈에 선한, 그래서 어쩌면 가장 형사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남자.
"그럴 리가? 그렇게 멍청한 소리들을 해대니 아직까지 그림자도 못 잡은 거지. 나는 정의천을 털어볼 생각이다. DAP 내부 정보는 네가 죽을 각오로 모으도록 해. 알겠나?”
나를 대신해 모든 것을 의심해 줄 남자.
오래전 선배의 충고가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쳤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찾아온 시험, 선택의 기로에서
"믿고, 움직이겠습니다. 대신 꼭 진범을 잡아주셔야 합니다."
"난 틀린 적이 없다."
새로운 의심을 믿게 됐다.
처음 한시진을 구상할 땐 정보를 모아야하니까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척 해도, 몇 개월 같이 고생한 팀을 의심하니 사실은 냉정한 성격이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세션을 플레이하면서 팀원들에게 정이 생기고 계속 의천씨의 구마ㅎㅎ로 자꾸 흔들리길래 생각보다 천성이 냉정한 편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생각한 스토리. 세션 끝나기 전까지 완성해야지 했는데, 이미 끝났죠 ㅎㅎㅎㅎㅎㅎ
묵진현에 대해서도 완전.. 냉정하고 의심병 말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까보니 꼭 그런건 아니었던.. 하지만 이건 초기에 구상한거라 어쩔 수 없이 묵진현씨 상당히 이런 이미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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