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 은스나 리처드 & 레이 세션 후일담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가끔씩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거센 돌풍에 의해 점검받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우리의 현장이 런던에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덜컹거리며, 어둠에 맞서 몸부림치는 등불의 빈약한 불꽃을 맹렬하게 자극했다. ¹
아닌 밤중에 끌려온 주치의는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맡은 바 소임을 훌륭하게 해냈다. 피가 굳어있는 환부를 소독하고 깨끗한 흰 천으로 꽁꽁 싸매면서, 물이 닿지 않게 주의하고 최소한 1-2주는 무리하지 말라는 충고까지 건조하게 건네 왔다.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레이는 새삼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이 밤에 자신에게 뒤처리를 시켰다면 한 소리 아니 열 소리는 했을 텐데. 심지어 리처드 본인도 아니고 같은 고용인(?)끼리인데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저 침착한 태도를 보라. 그야말로 고용인의 귀감이라는 생각에 뾰족한 말들이 스쳐갔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피곤한 안색으로 리처드에게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레이가 참아왔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는 이제 다시 긴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메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중앙의 문을 빠져나가 마차를 탈 것이다. 그러고도 한참을 달려 정문을 통과해 본인의 침대로 돌아가겠지. 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큰 저택이라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매일같이 드나든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넉넉히 남는 방과 그 방을 관리하기 위한 일손, 방 하나하나 채우고 있는 값비싼 물건들, 정원사 한 명으로는 어림도 없는 정원 부지. 이 저택 자체가 부를 과시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눈앞의 남자는, 그리고 남자의 아버지는 그것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는 사람들이었다. 어르신이 매일같이 앉아 있었던 서재에 리처드가 앉아있는 것을 본 어느 날,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납득하고 말았더란다. 이런 저택에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노라고. 자신이 이 저택의 수많은 방들 중 하나에 기생하여 살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마음 한 구석이 새카맣게 물들기도 했었지만....
"휴가라고 생각해야겠네요. 설마 환자에게 일을 주지는 않으실 테고..."
보란 듯이 붕대 감긴 팔을 흔들어 보이는 동작에 문가에 기대어 있던 리처드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대체 인력을 쓰지. 피차 고생했으니까, 그만 쉬라고."
"술."
"응?"
"술 어떤가요? 이런 날 그냥 자기엔 아까우니 기념으로."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일 뿐이다.
커다란 창문으로는 달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들이닥쳤다. 이 저택에 머물 때엔 늘 깊게 잠들 수 없었다. 옆사람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그 우리 같은 방에서 벗어나 가지게 된 혼자만의 방에서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럴 때면 레이는 소설을 떠올렸다.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을. 글귀를 그대로 가져다 그린 삽화와 더불어 생생한 묘사로 유명했던 소설의 첫 문단 마지막 문장, '어둠에 맞서 몸부림치는 등불의 빈약한 불꽃을 맹렬하게 자극했다.'를 되뇌었다. 이제는 그 문장이 아니어도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을 충분히 알지만, 익숙한 낯선 환경 탓일까 돌아서는 리처드를 붙잡고 만 것은.
"방금 의사가 무리하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무서운 싸움을 했으니 약 삼아 브랜디 정도는 괜찮겠죠."
"....."
물끄러미 바라보는 리처드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 묻혔다가 천천히 드러났다. 한 소리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리처드는 순순히 요청을 들어주었다. 동그란 테이블 위로 브랜디 병과 잔이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놓였다.
"금주법은 얼마 안 가 망할 겁니다."
잔에 차오르는 알코올 향을 맡으며 되는대로 내뱉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긴장으로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전국적으로 금주법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세상은 엉망진창이었다. 벌써부터 어느 마피아가 밀주에 손을 댔다더라, 만드는 사람은 처벌받아도 마시는 사람은 처벌받지 않는다더라 온갖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예외 항목인 성찬용 포도주와 의료용 브랜디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었다.
"뭐, 그러겠지."
법과 상관없이 지내고 있는 남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이라면, 성공적인 파티를 위해서 영해 밖으로 배를 몰고 나가 술을 들이킬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당당하게 마시고 고발되더라도 그의 화려한 약력에 한 줄이 추가되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말겠지. 그것이 눈앞의 남자, 리처드와 자신의 차이였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질문은 어쩌면 자신에게 했어야 하는 말이 맞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의 대답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으리라. 술잔을 노려보던 레이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본인이 잡았지만 더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마주 앉아 정답게 술잔을 기울일 사이가 아니긴 했다. 그동안 겪은 기묘한 일들이 그나마 두 사람을 좁혀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여전히 세계 정복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응? 세계 정복?"
이런 싸구려 술은 취향이 아닌데. 기어코 한 마디를 더 하고 잔을 비운 리처드가 가벼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면 좋고, 아님 말고? 그런 게 없어도 난 충분히 바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말야."
".... 리처드 씨의 그...런 마음가짐은 배워야 할 텐데 말이에요."
"자네의 숭배를 받는 것은 좀."
"숭배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겉도는 대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술자리는 이어졌다. 도무지 섞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모여 큰 일을 넘겼으니 이 정도 거리감은 괜찮다고 우기면서. 차곡차곡 쌓이는 취기 속에서 레이 언플랜은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어렴풋한 이미지가 점점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얼렁뚱땅 진행되는 이 술자리 끝에 깨달은 사실은 리처드는 폭풍우 같은 남자라는 것. 그는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자신은 평온하지만 정작 주변은 초토화가 되지 않았던가. 가장 많이 휘말린 사람은 자신일 테고. 폭풍우 앞의 빈약한 등불이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새삼 깨달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미움만으로 대하기도 이제는 어렵지 않던가....
".......그러니 옆에서 지켜봐야겠습니다."
"응? 뭐가?"
난데없는 말에 리처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다면 저 표정이 어떻게 바뀔까. 술이 깬 내일의 자신은 지금 발언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쯤은 자신도 그저 원하는 대로 말해도 되지 않을까.
"리처드 씨의 고문 변호사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저만큼 리처드 씨 뒤처리 잘할 사람 별로 없을 테니, 절 고용하시죠?"
1) 폴 클리포드, 에드워드 불워 리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세션 동안 레이..묘하게 리처드에게 독립을 한 듯 안 한 듯? 한 느낌이었던지라 이번 기회에 구직을 해서(? 아예 리처드네 회사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써봤습니다
아무래도 고문변호사로 있으면 둘이 더 사건에 엮기 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재밌는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벌 도련님(이제는 사장)과 잔소리 많은 고문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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