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C 팬메이드 시나리오 '괴물들과 마호라컬트' 내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¹ 하지만 산 디엔은 그것이 그저 거리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깊게 들여다보지 않지만, 불행은 굳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은 가벼워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불행은 파고들수록 깊어지니 결국 불행과 자신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멀리서 본다면 그 불행도 결국은 다 비슷비슷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산 디엔은 몹시도 얕은 성격이었고, 덕분에 자신의 환경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오히려 행운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방치되지 않았다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었을까. 그렇게 따져보면 확실히 행운에 가까운 것 같았다. 비록 그 방향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해도.
*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깊은 밤이 지난 시각이었다. 이미 한 차례 작업으로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기기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어둠에 잠겨있었다. 건조한 공기가 느리게 숨을 막아왔기에 물을 연신 들이키면서 디엔은 아침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무리를 해야 가능한 빠듯한 시간, 물을 마시는 것조차 낭비로 느껴지는 압박감이 기분 좋게 사람을 옥죄어왔다. 불가능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태평한 소리를 읊조리며 디엔은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실 제일 태평해 보이는 것은 이 사내였다. 방금 전까지 상의를 벗어던지며 바닥을 구를 기세는 어디 가고, 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희희낙락하며 침대의 푹신함을 즐기는 중이었다. 디엔의 한심해하는 시선을 느낀 사내가 그제야 끌어안은 베개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반가운 소리를 주워섬겼다.
"마녀야, 많이 컸다?"
"아깐 하나도 안 변했다더니."
얼굴이랑 키는 다른 거지. 너스레를 떨며 한참 아래쪽을 긋는 손동작에는 악의가 전혀 없어서, 좀 전의 일만 아니었다면 언제나의 일상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5년 전에는 이게 보통이었는데. 서로가 필요해서 모인 조직이었다. 다 함께 활동한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에게 유대감이나 연결고리를 논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 꽤 괜찮지 않았나. 사라졌을 때에는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막상 다시 보니 또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 지금 반가운 만큼 불퉁한 마음도 치미는 것이리라.
"이젠 나도 성인이거든."
"아하하, 그런가? 그 곳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져서..."
"아직도 그 소리야?"
"사실이래도."
아무래도 의진은 자신이 이상한 마도서에 휘말려서 지난 3년간 갇혀있었다는 설정을 계속 고집할 생각인 것 같았다. 지금으로써는 제대로 된 증거도 없고, 그렇다고 믿어줄 수도 없었기에 디엔은 헤드셋을 던져 주는 것으로 관련된 대화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는 언제나 이해 못할 기행을 태연하게 저지르곤 해서, 늑대가 어떻게 친구로 남아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도 차라리 그 기행의 연장선이라고 한다면 아예 이해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편하게 대해도 되지 않을까. 배신자는 처단해야 한다는 살벌한 말을 내뱉은 것과 다르게 마음 한 구석으로는 어느샌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구석을 만드는 자신을 모르는 척하며 일부러 심술궂은 목소리를 낸다.
"아저씨 지금 너무 편하게 있는거 아냐? 자신의 처지를 알기나 해? 악마 아저씨는 배신자라구."
"배신을 안 했는데 왜 배신자야?"
"그거야, 지금부터 진실인지 아닌지 판명되겠지."
노트북 화면에 새까만 창이 연달아 떴다. 빠르게 올라가는 글자들을 눈에 새길 것처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처음 전자 마약을 접했을 때가 떠올랐다. 언제나와 같이 누구도 찾지 않는 환경에서 마녀, 디엔은 사이버 세계를 휘젓고 있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현실의 그 무엇도 반영할 필요가 없어서 그곳에서는 15살 아이일 필요도, 남자일 필요도 없었다. '마녀'라는 이름을 쓴 것은 순전히 사람들이 착각하길 원해서였다. 이미 마녀는 유능한 해커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활약하고 있었고 디엔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캐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것이 당연했다. 그야말로 자신은 마술을 쓰는 마녀처럼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유린했다...
"마녀야?"
"아,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천사에게서 건네받은 도청장치를 흔들어 보이며 디엔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모이기 전부터 난 이걸 알고 있었어.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순식간에 자신의 노트북을 감염시켜 멋대로 하던 연주. 지금에 와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을 뒤틀리게 하면서도 뇌를 울리는 환희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것은 기이한 음이었다. 불협화음이라든가 화음이라든가 그런 음악적인 요소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인식은 하지만 음악이 아닌 기묘한 연주곡. 차라리 어떤 메시지에 가까웠던 것도 같다. 내면에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 완전히 헤집어 놓는 감각. 무언가의 의식이라도 되는 것 같은 경험 속에서 디엔은 사탄이라도 영접한 것처럼 전자 마약에 매료되었다.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유령이 찾아와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찬성한 것도 수술 대상을 '마호로바'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전자 마약을 마호로바가 연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그 이름난 대기업을 털어먹는 일을 혼자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조직이 만들어졌다.
"아저씨가 빠지고(빠진 거 아니라 불운의 사고였다니까라고 의진이 궁시렁거렸다) 데이터를 손에 넣긴 했는데 미완성이더라구."
그래도 어떻게 백신을 만들었는데, 오늘 완성된 데이터가 굴러들어 왔지 뭐야. 도청장치를 기기에 연결하는 디엔의 음색에는 짜증과 기쁨이 반씩 섞여있어서 의진이 저도 모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의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디엔이 다각다각 기기를 조작했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끝없이 나열되고 그 사이사이 디엔이 무언가를 써넣는 모습은 꽤나 진지했기에 의진은 잠자코 헤드셋을 쓰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다시 조직으로 복귀하고 싶어서 실험을 자청했지만 스멀스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발을 빼야 하나 슬금슬금 몸을 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디엔이 몸을 돌렸다. 환한 웃음이다. 보는 이를 서늘하게 하는 웃음을 지으며 디엔이 입을 열었다.
"악마 아저씨, 아저씨는 신을 믿어?"
"응? 으응? 아니 안 믿는데 왜?"
"안타깝다. 기도라도 할 상대가 필요할 텐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완성시킨 물건이니 얼마나 대단하겠어. 난 이걸 전부 맛볼 생각이야 아저씨. 낱낱이 전부 해부해 조각낼 거니까 그때까지 버텨야 해. 알았지? 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디엔이 웃으며 스위치를 눌렀다.
₁.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연진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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