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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 Log

[현무영] 백귀야행(1)

사람의 사주가 아니네.

 

버석하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어린아이처럼 굴며 손에 오색기를 쥐고 춤추듯 흔들고 있던 터였다. 조상의 원한, 선대의 묫자리, 전생의 업 이런 단어를 줄줄 늘어놓으며 부모의 마음을 휘저어 거한 굿판을 주워섬겼던 것이 불과 몇 분 전의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당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먼 하늘을 응시하며 홀린 듯이 흘러나오는 고저 없는 음성은 일종의 계시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태를 빌어 태어났으니 무엇이 문제더냐.

 

이는 굿을 하자며 부모를 설득하는 말도 아니었다. 돌아가는 순리를 짚어내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아이에게 주어진 '운명'에 관한 가르침.

 

세상의 오복을 누리지 못하니 타고난 신체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할 것이며, 강녕하지 못해 안팎으로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곳간이 차는 일 없어 배를 곯고, 베풀지 못해 이는 내세에도 업이 되어 편안히 눈 감지 못할 것이다. 

 

저주에 가까운 말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부모는 깊게 절망하다 끝내 포기한다. 아이는 그 순간에도 까닭 모를 고열 속에 배운 적 없는 언어를 나열하며 끝없는 자기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걸 안하면 죽을 것 같다고 해요."

 

무더운 나날이다. 끓기 시작한 냄비처럼 온도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은 연일 최고 기온을 갱신하는 나날. 지금도 잘 드리워진 블라인드 사이로 날카롭게 쏟아지는 햇볕이 가시처럼 콕콕 박히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쐐기처럼 같이 박혀드는 태연한 목소리가 하나.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사람을 골라서 자리 잡는 것도 제법 일일 텐데,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이 목숨과 몸뚱아리잖아요?"

 

목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들끓는 바깥과 다르게 한없이 서늘하면서도 건조할 것이라고 현무영은 생각했다. (여러모로) 새까만 어린 후배가 늘어놓는 말은 사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본인의 목숨과 몸뚱이가 아니던가. 다만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뿐. 하지만 그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구차하면서도 지난한 일이다. 태어날 적부터 짊어진 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들 이미 사이비로 못 박혀 있는 마당에 사이비에 대한 편견만 강화시켜 주는 일이 되고 말겠지. 짧은 시간을 겪었지만 무영은 백유위가 무속인을 상당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런 경향이 '조금' 있다고.

 

'조금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만 그 점을 이야기하면 깐깐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후배의 성격상 저를 납득시킬 때까지 물고 늘어지리라. 그래서 무영은 더 설명을 하는 대신 말을 돌리는 방향을 선택했다. 

 

"후배님이 한 말 중에 제일 후련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네. 그럼 아침 먹고 나서 그 아르바이트 일을 처리하면 되려나?"

 


 

제 목숨과 몸뚱아리를 빌미로 협박한 적이 있긴 했다. 정확히는 협박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날은 유독 별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하늘 가득 빛나고 있어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깊은 어둠으로 산등성이는 밤하늘에 풀어져 하나가 되어 있었고, 어디부터가 산이고 하늘인지 구분가지 않는 새까만 장막 아래 간간이 들려오는 산짐승 울음만이 어렴풋이 그 존재를 알게 했다. 그림자 같은 나무들이 바람에 쓸려 이파리 흐느끼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무영이 한 걸음 내디뎠다. 보통 밤에는 입산을 금지하지만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두 걸음. 발에 밟히는 낙엽이 저녁 찬공기를 머금고 바스러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세 걸음. 이 길의 끝에는 절벽이 있었다. 사고가 잦아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놓은. 네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을 타고 움직이던 뱀이 무영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아래로 내려가더니 점차 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네 걸음 반. 무거운 족쇄를 매단 것처럼 발목을 뻐근할 정도로 아프게 내리눌러 오른발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네 걸음 반의 반. 

 

".... 빌어먹을."

 

다섯 걸음을 채 옮기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무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다리는 이제 그의 통제를 벗어나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바늘로 다리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갉작갉작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몸에 깃든 신이 힘을 쓰니 신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바닥을, 낙엽과 흙과 자잘한 돌이 뒤섞인 바닥을 긁어내리며 기어갔다. 차라리 죽겠노라고 그렇게 말을 하면 자신을 놔주지 않을까 해서. 길러준 무당이 죽었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었다.

 

부모가 포기한 아이를 거둬간 것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먼 친척이었다. 어느 산에 작은 암자를 짓고 무슨 보살이니 불린다던 그녀는 기꺼이 인간이 아니라는 아이를 거두어갔다. 그러면서 이 또한 전생의 인연이라 했으니, 결국 그녀도 신의 설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 신을 받아들여 모시는 것으로 생을 이어가라 말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빌어야 한다.

무엇을 빌어야 하나요.

삶을.

그러면 아프지 않을 수 있나요.

그분들은 자애로우시니 말을 잘 듣는다면 살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안 아프게 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어린 나이에도 버려졌다는 자각은 현명하게도 뒷말은 하지 않는 눈치를 길러주었다. 어쩌면 그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이든 하늘이든 빌면. 빌어서 무엇인지 몰라도 용서를 받는다면, 그렇다면. 다시 부모님이 받아줄까. 결국 자신의 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말씀이 뱀의 형상으로 새겨지고 그로 인해 삶을 허락받았지만 부모가 받아주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는 '신'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가 모시는 신은 무영이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신내림을 받은 후부터는 누구의 말대로 '사이비의 삶'만이 가능했다. 

 

"어떻게든..."

 

신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날을 길일로 잡았는데도 몸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미 산바닥에 몸이 쓸릴 대로 쓸리고 힘주어 바닥을 긁어내리는 손톱은 죄 부러져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막무가내로 몸을 비틀어 저항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의식이 흐려지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병원의 침상이었다.

 

"...."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병실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는 신에 대한 무영의 첫 반항이자 첫 실패였으므로. 그 후로 시도한 무수한 저항과 실패 속에서도 가장 '처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억에 강하게 남는 법이다. 그 지독한 절망과 증오에 대해. 

 


 

 

"1시인데, 점심은 먹고 갈 건가요?"

"....... 영화관 가서 팝콘 사... 일은 끝냈어?"

"그럭저럭요? 선배님을 보아하니 낮잠은 잘 주무신 것 같고."

 

잘 잤지. 아침의 대화에 욱해서 옛 기억이 떠오를 만큼 푹.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몸을 점검하는데 어쩐지 신탁의 상태가 이상했다. 따지고 보면 이 신탁ㅡ신의 말씀은 처음부터 유위를 경계했던 것도 같다. 그에게 붙은 어둑시니를 떼어내야 한다고 하면서도 유위라는 사람 자체에 다가가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도 했다. 신탁에 감도는 은은한 불쾌감을 감지한 순간 더 보란 듯이 그의 집에 머물며 상황을 봤으나 '평소처럼 반항에 대한 신벌'은 내려오지 않아 사실 무영도 의아해하던 차였다. 쌀 점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의 후배는 좀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어.. 덕분에 푹 잤어. 니네 침대 좋네... 저거는 들고 갈 수 없으니 이따 다시 와야겠다."

 

남들의 이목을 끄는 무구를 핑계로 다시 한번 그의 집에 머물 생각으로 던진 말에도 신탁은 조용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영은 얄미운 소리를 하는 후배를 어느 정도 용인하고 사랑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 후로 이어진 무구에 대한 쓸데없는 논쟁도 즐거울 만큼 무영은 이 후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딜 가서 이런 불경한 소리를 잔뜩 할 수 있단 말인가. 쌀 점에 현미를 섞어보라는 말을 할 때도 생각했지만 눈앞의 후배는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자신의 대답ㅡ 개기는 것 같고 마음에 든다는 소리는 솔직한 찬사였는데 아마 모르겠지. 신을 엿 먹일 수만 있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이 발 벗고 나서리라는 것도. 

 

신에 대한 첫 반항 이후로도 무수한 시도를 했다.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입학한 것도 그 반항의 일환이었다.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과 신에 대한 저항이 어우러진 합작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물론 신도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어서 걸핏하면 신병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1-2년씩 휴학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버텨온 시간이 7년이었다. 이제는 학교에서 지정하는 휴학연수도 다 채우고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와서 조금씩 체념하던 차에 나타난 백유위라는 존재는 무영에게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결국 후배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것이니 경계대상이 되어도 할 말이 없긴 하네.'

 

하필이면 그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있는 후배가 지독한 사이비 혐오자라는 것이 큰 문제지만 이번 일을 해결해 주면 어느 정도 신뢰를 쌓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때마침 유위에게 따라붙으려고 낑낑거리는 검은 어둑시니를 보며 앞으로를 가늠한다. 보통의 어둑시니와는 왜 다른 행태를 보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사라지지 않고 유위에게 계속 붙어 있으려고 하는지 모든 것이 의문이지만 보름 후 살풀이 굿을 하는 것으로 해결되리라. 그럼 그것을 대가로 조금은 자신의 일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부탁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무영은 유위가 자신을 완전히 거부할 것 같진 않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꾸준히 사이비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의 말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는다. 유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계산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찌 보면 지독한 효율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그 부분을 노리면 약간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운명이나 계시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에 가까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게 옭아맨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것 또한 사람이 아니던가. 대부분의 끝은 비극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 믿으면서. 하지만 현무영은 자신의 끝이 비극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벗어나는 것'. 인간이 아니라는 천형과도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기쁘게 해내리라. 그러니 우선은 이 후배와 친해지도록 하자.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하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나간다면 적당히 영화 보기 좋은 시간에 도착하겠지. 

 

잠시간의 소란 후에 현관문이 닫히고 다시금 공간에는 침묵만이 남겨졌다. 

 


현무영 퇴마사버전 백스.. 분위기 잡는다고 썼는데 이거 너무.. 

ㅎㅁㅎ)>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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