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C 시나리오 <Switch!>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한 편 현무영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잘 손질된 총 한 정. 매일 마른 천으로 깨끗하게 닦아 관리하는 그의 무기로 품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잘 때조차 베개 밑에 두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검은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약병과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나무로 만든 작은 함이 있었고, 또 그 옆에는 손바닥 크기의 수첩과 마찬가지로 오래 사용해 길이 잘 든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배터리가 나간 것인지 작동하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화엽이라고 적혀 있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익숙하게 꺼내 물었다. 라이터는 어디 간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으나 어차피 병원에서 금연을 권했던 터라 필터 끝만 질겅이면서 마지막 물건을 시야에 담는다.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아 새것이나 다름없는 딸랑이를.
"내가 다 건 몰라도 기필코 저것만큼은 여기에 버리고 간다."
이를 악 물듯 말하는 내용은 일종의 선언이자 다짐이었다. 기필코 실수로 저것을 잃어버리리라. 안된다면 실수로 부수고 말리라. 사람의 소지품으로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물건들을 본 사람은 백유위에 대해 어디까지 추측할 수 있을까. 총과 수상한 약병, 나무 함 그리고 담배와 딸랑이를 들고 다니는 남자에 대해. 아마 단언컨대 그 누구도 백유위라는 인물상을 정확히 그려낼 수 없으리라. 매일 곁에서 보기를 1년이 되어가는 자신도 여전히 그 생각 전부를 짐작하기 어려우므로. 하지만 현무영은 여전히 곁에 있다. 알고 싶다는 기묘한 호승심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었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내선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노려보듯 전화를 바라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움직이겠다고 했으나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화 너머 목소리는 평소 백유위와 같았고, 내용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이렇게 쉽게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백유위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마 통화 상대는 진짜 백유위가 맞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찝찝했다. 뒷목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 감은 자신이 한 때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듯 한 번씩 날카로운 신호를 보내올 때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그 감은 잘 맞아떨어졌고 지금도 감에 따라 모든 것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진짜 백유위가 맞다면 이 불안감을 뭘까. 역시 순금 딸랑이에 대해 들었을 때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던 게 아닐까. 설마 진짜 만들지는 않겠지. 무언가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몸서리치며 무영이 뒷목을 쓸어내렸다. 한 번 더 전화를 걸까 고민하다 끝내 몸을 돌린다. 차라리 이곳을 빠르게 나가 백유위와 합류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주위에 사람이 없고 고요하니 이상한 생각이 더 잘된다는 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그를 찾아야 했다. 일단 그를 본다면 이 불안의 근원도 확실해지겠지. 이미 순금 딸랑이의 제작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현무영이 새하얀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아 사람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다들 어디간거람?"
잔뜩 경계하고 나선 것이 무색하게 이 건물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깨어난 실험실과 같은 색의 새하얀 천장과 새하얀 바닥, 새하얀 벽으로 꾸며진 내부는 어떻게 관리를 한 것인지 사람의 손을 하나도 타지 않아서 새것 같아 보였다. 자신들을 납치하고 사라진 사람들과 무언가 실험이 있었다는 흔적을 제외한 다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기묘한 건물.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일이란 대게 불쾌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라 무영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고 돌아다녔다. 오히려 자신의 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털어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드키로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청색동 의무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의무실-어째 의무실이라고 이름 붙은 곳은 다 비슷비슷하네-에 이르러 유위와 통화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ㅡ그거 어디 영화 설정 같은 거래요?"
"그러니까요. 사람이 없어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일단 알고는 있어요."
"최악의 경우에는 저희도 뭔가 실험을 당했다?"
이어지는 유위의 말에 무영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았다. 그러고보니 생각보다 더 멀쩡한 몸의 상태에 자신의 체질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곧이곧대로 듣기에 초능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얄팍하기 그지 없어서 무영은 유위의 말이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초능력을 연구하는 연구소라는 거죠, 여기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닐까요. 물론 세상에는 수호신이라고 불렸던 이상한 생물도 있었고, 사람의 눈에 블랙홀을 심어두는 벌레같은 것도 있고, 사람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나무가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런 기이한 생물과 초능력은 좀 다른 문제 아닌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아 멍하니 유위의 총을 돌리며 앉아 있었다. 유위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기 때문에 그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고 움직이겠거니 생각할 뿐. 그럼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나타나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거지. 총으로 해결이 되나?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그것'이 나타났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훑으며 돌연 그것은 나타났다. 둥그스름한 머리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빨판 달린 촉수가 어쩐지 문어를 생각나게 했으나 그것을 단순히 문어라고 부르기엔 그 아래 기형적으로 달려 있는 인간의 신체 부위가 흉물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어의 몸 아래 인간의 몸통과 팔다리가 각각 장신구처럼 매달리듯 이어져있어서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처럼 바닥을 덜그럭거리며 기어 왔다. 잘못 만들어진 조각상이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것 같은 움직임에 현무영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기가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그래도 초능력에 비하면 이상한 생명체에 대한 것은 내성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습관적으로 나이프를 꺼내 휘두르려다가 손에 잡히는 차가운 쇠의 감촉에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유위의 무기라는 것을 깨닫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유위가 평소 무기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옆에서 봐왔으니 잘못 다루었다가 파손되거나 고장이라도 난다면 상당히 난감하리라. 전화에서 유위 본인이야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죄지은 자가 더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단 거리를 벌리고 위협용으로 쏜 한 발에 문어의 촉수 하나가 끊어져 나갔다. 물컹거리는 점액성의 무언가 터져나가는 것이 영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별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그것은 통각이 없는 것처럼 그대로 거리를 좁혀 촉수를 뻗어왔다. 마치 나뭇가지가 가지를 뻗는 것처럼 여러 갈래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찔러들어온다. 어쩐지 춘절에 겪었던 그 익숙한 형태에 기겁하며 총으로 쳐내고 옆으로 몸을 굴렀으나 화끈한 감각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사이 무영의 왼팔을 붙든 문어 같은 것이 촉수 아래 무저갱 같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이빨 같은 것은 왜 달려있는 거지. 톱날같이 빽빽하게 차있는 이빨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머리부터 물어뜯을 것처럼 구는 것을 보고 총구를 겨누었다. 바짝 붙어 있어 빗나갈 일은 없겠지만 어쩐지 총을 들면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라서 쓰게 웃으며 그대로 오른손을 놈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이러면 절대로 안 빗나가잖아. 그렇지?"
자신의 팔을 씹어 삼키기 전에 방아쇠를 당긴다. 오른쪽 어깨에 전달되는 묵직한 반동을 견뎌내며 무언가 터져나가는 것을 본다. 생긴 것에 비해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었나 보다. 오른팔에 걸린 녀석의 이를 들어내며 이 꼴을 백유위가 안 봐서 다행이라고 현무영은 생각했다. 총이 원거리 무기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냐며 필시 한소리 들었을 것이므로.
"그나저나 상처 다시 터졌는데 병원 가서도 혼나겠네. 어쩌냐 진짜."
시체를 대충 발로 밀어내고 보관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익숙한 상황에서 인간은 방심하기 마련이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방심했다. 보관실에서 백유위와의 대화가 만족스러웠다. 인간으로 볼지 짐승으로 볼 지 결정을 못해서 결국 내 이름을 기껏 외우고도 부르지 못했다고 했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자신이 갈 곳은 결국 수조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반발하듯 수조에 몸을 맡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조는 깨지고 짐승은 인간이 되어 귀환했다. 생일을 받고 이름을 되찾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름 자체를 잘 외우는 성격도 부르는 성격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도, 돌 안 지난 어쩌고 하는 어르신은 좀 아니지 않나. 매번 다른 이들에게 상황을 얼버무리는 것도, 그 기묘한 호칭이 현무영이라는 인간을 대표하게 되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고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여하튼 협상은 만족스러웠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니 조금씩 바뀌겠지 하는 기대감. 그것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래서 방심했다.
"..."
"..."
"... 아 젠장."
"어, 어떻게!"
지금껏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없는 탓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수면실에는 마침 무기를 정비 중인 경비원이 있어 운명같은 마주침을 겪고 말았다. 찰나의 머뭇거림 끝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들고 있는 무기들을 휘두른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어 돌리고 있던 것을 그대로 총구를 손으로 감싸쥐어 나이프처럼 휘둘러 상대방이 내리치는 것을 받아쳤다. 깡하고 철기와 철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아차 싶은 현무영이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괴물을 상대로야 총을 나이프처럼 휘두르든 멀리서 쏘든 알아먹지 못하겠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는 약점을 감추어야 하는 법이다. 거기에 더이상 유위의 총에 기스가 나는 것 역시 사양이었다. 되도록이면 한 방에 보내기를 바라며 총구를 겨눈 그 때 이변은 찾아왔다.
"....?"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누군가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 방아쇠에 능숙하게 손가락을 걸고 습관처럼 확보하는 사각 지대의 확인과 시야 확보. 이것이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이 움직임을 알고있다. 늘 봐왔으니까. 닮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무언가. 아니? 언젠가는 넘어서야겠다고 생각한 것들. 평소에 사용하는 것과 다른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대로 상대에 품에 파고들어 총구로 올려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귓가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진동이 다시 한 번 느껴졌지만 아까와는 달리 수월하게 반동을 버텨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노린 부분은 미간이었으나 아슬아슬하게 귀를 떨어뜨린 것이 균형을 잘못 잡았나 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해보면 되지. 봉인지 나이프인지 모를 것을 휘둘러 대기에 총으로 막으려다 아차 싶어 품에 잡히는 것을 꺼내들어 손등을 후려쳤다. 싸움에 걸맞지 않은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ㅡ총이 기스나는 것보다는 딸랑이가 망가지는게 낫겠죠. 위?"
비록 178달러 짜리지만. 아 가격 생각하니 다시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딸랑이를 던지고는 거리를 벌리며 다시 한 번 총구를 겨누었다.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경비원의 집중이 깨지는 것이 보인다. 순간의 틈, 찰나의 방심은 언제나 생과 사의 경계를 가르고 심장을 겨누는 누군가의 인도에 따라 착실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리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한 총구에서 화약 연기가 흩어졌다. 초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손과 시야에 남는 감각에 심장의 울림을 느낀다.
"초능력이라는거 진짜 있긴 한가본데."
평소 자신이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 눈에 익은 누군가의 몸짓. 어떠한 경지는 찰나의 경험으로도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 일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을 때의 희열...
"언제 따라잡냐 진짜. 돌아가거든 대련이나 늘리자고 하든가 해야지."
씁쓸한 어조와는 다르게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을 띄우고서 현무영은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현무영 시점에서 스위치 진행상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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